반도체, 꼬리가 몸통 흔든다 / 내일신문(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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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당부서대외협력팀
- 작성자권민지
- 등록일2023-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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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평] 반도체, 꼬리가 몸통 흔든다
"변화를 이끌면 리더가 되고, 받아들이면 생존자가 되지만, 거부하면 죽음을 맞게 된다." 현대 미술의 거장 '장 피에르 레이노'의 말이다. 마치 최근 반도체 시장의 현실을 꼬집는 듯하다. 반도체는 초소형·저전력·고용량·고성능이 경쟁력의 핵심이다. 이는 웨이퍼를 제조하고 회로를 새기는 전(前)공정, 칩을 패키징하는 후(後)공정 기술력이 뒷받침할 때 가능하다. 오랫동안 후공정은 전공정에 비해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최근 들어 공정 미세화의 한계로 반도체 성능 개선 및 가격 경쟁력 확보가 어렵게 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수요에 맞춰 여러 개의 칩을 하나로 묶는 첨단 패키징이 미세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떠오르며 후공정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게 됐다.
후공정(OSAT) 시장의 '글로벌 톱10'에 한국 기업 하나도 없어
첨단 패키징은 성능 개선, 가격 경쟁력 확보뿐만 아니라 개발기간 단축도 가능해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여기에 구글, 애플 등 독자 칩을 개발하려는 빅테크 업체가 늘어나면서 패키징 시장이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패키징기술에 따라 칩 사이즈, 소모전력, 시스템 설계방식 등이 달라지므로, 기업별로 고유의 제품 사양에 따라 다양한 패키징 방식과 기술을 요구한다.
이처럼 폭넓은 수요 증가로 패키징 시장은 연평균 6.3% 성장하여 2027년 1219억 달러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블루오션 같은 패키징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은 어떠할까? 아쉽게도 패키징을 포함하는 후 공정(OSAT) 시장의 '글로벌 톱10'에 한국 기업은 하나도 없다. 1위를 포함해 6개가 대만 기업이고, 나머지는 중국과 미국 기업이다. 이러한 상황은 각국의 반도체 생태계의 특성과 경쟁력 차이에서 비롯된다. 대만의 반도체 생태계는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설계, 패키징 및 테스트 기업이 고르게 협력하며 성장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종합 반도체 기업이 주도하면서 메모리를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국내 패키징 기업의 성장 기회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한국 반도체 패키징의 도약은 가능할까? 다행히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패키징 선두 기업인 ASE의 점유율은 30% 수준으로 '글로벌 절대 강자'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민간과 정부의 역할 분담과 협업을 통해 혁신적 기업을 육성하고, 도전적 기술개발을 촉진해 핵심기술을 선점하며 패키징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대만은 정부 주도하에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한 다수 외주 패키징기업들이 상호 협력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패키징 기술력 1위인 TSMC는 후공정 기업들과 협력하며 생태계를 만들고 기술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민간 패키징 연구소 유치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인프라를 강화하며, 패키징 연합전선을 구축해 시장 발달을 서두르고 있다.
출발은 늦었지만,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과 OSAT 기업도 이제는 합심하여 첨단 패키징 선도기술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각 분야를 균형 있게 성장시키고 가치사슬 전반을 강화하여 패키징 전문성과 경쟁력을 확보하려 한다. 글로벌 반도체 첨단 패키징 산업의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해 우리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반도체 첨단 패키징 선도 기술 개발'을 위한 대규모 R&D 프로젝트를 통해 '기술선도형, 기술자립형, 글로벌 기술확보형 전략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해외 선진기관들과 국제 공동 연구를 통한 오픈이노베이션 R&D 지원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민간과 정부 역할 분담과 협업으로 패키징 생태계 선순환 구조 만들어야
90년대 영화(Wag the Dog)로 만들어져 유명한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그간 소외받던 후공정인 패키징이 이제 반도체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역동성과 혁신성이 탁월한 우리 반도체 업계가 '미래 패키징 기술'을 선점함으로써 반도체시장 왕좌 게임의 '절대 승자'로 등극할 날을 그려 본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장